낮에나온 반달

밤에 나타난 옆집 친구 2

초원의 호수 2024. 2. 13. 23:12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밤공기가 코끝으로 전해지며 꽉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 주는 것 같았다.
늦게 온 친구들이 괜찮냐고 하며 집까지 태워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밤공기를 마시며 걸어가겠다고 했다.

발이 화끈거리는 고통은 있었지만 그래도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화상을 입은 발에 힘을 줄 수가 없어 약간 절름발이 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그런데 한동안은 아무 일 없이 잘 걸어갔지만 어느 순간부터 발에
불편함을 느꼈고 중간 지점까지 왔을 땐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을 살펴보니 발바닥에는 야구공 만한 물집이 생겨나고 있었다 ,
거기서 책상다리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뜨거운 물을 발등이 아닌 발바닥에 부운 것이다.
그리고 물을 부었다기보단 쏱았다고 해야 더 맞는 표현이다.

나는 신작로 주변에서 막대기를 하나 구해 지팡이처럼 의지하며 걸었는데
그나마 그것마저 부러져 깽깽이걸음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동내 앞까지 왔을 땐 기력이 모두 소진되어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이제 집까지는 겨우 150여 미터 남았지만 지금 내게는 그 거리가 엄청난 거리이다.
누군가의 어깨를 짚고 간다면 아주 쉽게 갈 수 있지만 이 시간에 누가 있겠나
휴대폰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휴대폰은 시골집 앞마당에 주차되어있는 차 안에 있었다.

나는 동내 앞 가로등이 켜 있는 전붖대에 기대며 털썩 주저앉았다.
시간은 자정을 훨씬 지나고 있었고 차가운 밤하늘엔 눈솝같은 초승달이
희미한 빛을 뿌리며 앞개울 전선줄에 걸려 서산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보였다. 자동차 불빛은 점점 가까워 오더니
내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누군가를 내려준 후
다시 왔던 길로 뒤 돌아갔다. 자동차 불빛은 택시였고 이 동네 사람
누군가가 택시를 타고 들어온 모양이다.

나는 너무 반가웠다 , 이 동네 사람들은 거의 다 아는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에 의지해 간다면 집까지 쉽게 갈 수가 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택시에서 내린 사람은 뜻밖에 인물이었다.

"여기서 뭐 해"
어느새 다가온 그 사람은 주저앉아있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자의 목소리였고 상당히 낯익은 목소리다.
숙이였다.
숙이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나하고는 학교도 같이 다니는 등 오래도록 좋게 지낸
친구 사이이다.

그런데 내가 군대에 가 있을 무렵 양주 어느 곳으로 시집을 갔다고 들었다.
양주로 시집간 숙이는 신랑과 정미소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일까. 사는 곳이 양주 라면 가까운 거리는 아닐 텐데
한밤중에 택시를 타고 친정에 온 걸 보면 혹시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지만 나는 그런 건 생각할 틈도 없이 오랜만에 보는 숙이가 반가워
나도 모르게 "숙이 맞지 " 하면서 대답도 듣기 전에 두 손으로 숙이의 손을 잡았다.
"응 나 숙이야, 근데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 그러자 숙이는 허리를 굽혀
내 발을 살펴보더니 " 어머나 " 하면서 깜짝 놀란다


30분 전만 해도 야구공 만하던 물집이 이젠 축구공 만하게 자라 있었다.
화상을 입으면 물집이 생긴 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크게 자랄 줄은
몰랐다. 나는 숙이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내 발을 보신 어머니와 형수님은 이게 무슨 날 벼락 이냐며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때 아닌 밤중에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응급처치라고 해봐야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기껏해야 장독에 있는 된장을 퍼다 발에 발라주고 된장이 떨어지지 않게 붕대로
감아 주는 게 전부였다..

어머니는 된장을 바르면서 개업친구의 제수씨를 연신 비난했다.
남의 아들의 다리를 못쓰게 만들었으니 날이 밝은 데로 가서 따져야겠다는 등...
하지만 제수씨의 실수라기 보단 사실은 내 잘못이 더 크다.
나도 제수씨가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오는 것을 보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얼른 일어나 주전자를
받아 왔을 텐데 옆에 친구와 이야기를 하느라 경황이 없어 미처 깨닫지를 못했다.
결국 제수씨는 무게에 중심을 잃어 커피잔에 조준을 하지 못하고 내 발에 쏟아 부운 것 같았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