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나온 반달

사형제를 폐지해달라는 사형수가 있다. 1

초원의 호수 2024. 2. 13. 10:18

사형제를 폐지해달라는 사형수가 있다. 
그는 세 번째 사형제 헌법소원 심리가 진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2021년 
해당 사건의 보조참가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국가가 자신의 생명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사형수의 이름은 정형구. 기분이 나빴다는 이유만으로 신혼부부에게 엽총을 난사한 자다. 
그는 살인‧살인미수‧절도 혐의로 2000년 7월 사형을 확정 받고 23년째 옥살이 중이다.

내게도 살 권리가 있다고 외치는 이 사형수는, 그날 무슨 일을 벌였던 걸까.
1999년 1월 19일 오후 4시 10분. 강원도 삼척시 노곡면 상마읍리 문의재 언덕길. 
검정 그랜저 한 대가 비포장길을 달리고 있었다. 
번호판은 ‘전북29가 9819호’. 전주에서 올라온 차량이었다.
 이 고급 세단에는 신혼부부 김모(28)씨와 장모(27)씨가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실혼 관계로 슬하에는 7살, 2살 된 딸들도 있었다.

전주에서 택시 기사로 일했던 김씨는 형편이 어려워 결혼식을 미루다 7년 만에 혼례를 올렸다. 
이날은 식을 마치고 이틀 뒤 뒤늦게 강원도로 신혼여행을 떠난 날이었다. 
삼척에는 아내의 외삼촌이 살고 있었다. 가난했던 부부는 여행 기분을 내기 위해 
그랜저 차량을 빌린 것으로 당시 언론 기사에는 나온다. 
집안 어른께 인사드린다며 고운 한복도 맞춰입고 있었다.

그 날 오후 3시쯤 삼척 시내에 들어선 장씨는 “곧 찾아뵙겠다”며 외삼촌 댁에 전화를 걸었다.
그로부터 1시간 뒤 두 사람은 산길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몸에는 수십 발의 총탄이 박혀있었고, 
한복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범인은 바로 앞에서 달리던 액센트 탑승자 정형구(당시 36세)였다.


정형구는 그날 사업 실패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고향인 강원도로 꿩 사냥을 갔다. 
그에겐 합법적으로 등록된 산탄총이 있었다. 과거 수원에서 ‘팔도강산’ 주점을 운영했을 때
 종업원으로 부렸던 한준희(당시 33세)가 사냥에 동행했다. 
이 둘은 사냥을 끝내고 동해로 가던 길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한준희는 느리게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그러자 뒤쫓아가던 김씨가 액센트를 앞질렀다. 흙먼지가 날렸고 정형구는 순간 격분했다. 
그랜저를 탄 젊은 신혼 부부가 사업에 실패해 소형차를 타고 다니는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한준희와 정형구는 창문을 열고 김씨 부부에게 거친 욕을 내뱉고 삿대질하며 그랜저를 추월했다.
 뒤이어 김씨도 욕으로 받아치며 다시 액센트를 제쳤다. 
비포장 언덕길에서 펼쳐진 그랜져와 액센트의 추월 경쟁은 약 1㎞ 정도 거리에서 5분간 이어졌다.

김씨 부부는 잘못 걸렸다. 운전대를 잡은 한준희는 절도 전과 5범, 
조수석에 앉은 정형구는 강도‧강간 등의 전과 6범이었다. 
이 전과자들이 탄 차 안에는 장전된 엽총이 놓여있었다.

“야, 차 세워.” 정형구의 말에 한준희는 차를 멈췄다. 
정형구는 총을 집어 들고 조수석 창 밖으로 상반신을 쭉 뺀 뒤 3m정도 앞서 달리는 
그랜저 운전자의 목 뒷덜미를 조준하고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세 번의 총성이 울렸고 그랜저가 멈췄다.
정형구가 쏜 총은 이탈리아 베넬리사에서 만든 12구경 산탄외대. 
산탄총은 탄환 여러 개가 흩어지도록 발사해 명중률을 높이는 총기다.


정형구는 꿩 대신 사람을 겨눴다. 탄환은 날아가 김씨 뒤통수를 명중했다. 
정형구는 총을 들고 액센트에서 내렸다. 차 안에서 공포에 떠는 장씨에게 나오라고 소리치며 
그랜저 앞 유리와 조수석 바닥에 엽총 두발을 발사했다. 
한준희는 거들었다. 돌로 운전석 창문을 깼고 의식을 잃어가는 김씨와 그 옆의 장씨를 끌어냈다.

아내 장씨는 혼수상태인 남편을 살려달라고 절규했다. 
방금 남편을 쏘고 그 순간에도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정형구에게
 “남편을 제발 병원으로 데려가달라”며 빌었다.

그때였다. 인적이 드문 길에 차량 한 대가 지나쳐 갔다. 
인근 도로 공사현장에서 감리책임자로 있던 A씨의 차였다. 
그는 정형구의 범행을 본 유일한 목격자였다.
정형구는 A씨와 장씨를 모두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A씨 차를 향해 엽총 네 발을 발사했다. 
그 중 한 발이 A씨의 뒷머리를 스쳤다. 
A씨는 피를 흘리며 가속 페달을 밟아 현장을 빠져나갔고,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A씨는 전치 2주의 두피 다발성 파편상을 입었다. 
그는 목격자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현장을 지나가는데 엽총을 들이댔다.
 휙 하고 가버리니까 금방 뒤에서 불이 번쩍 하더라.”

아직 살아있는 장씨 때문이었을까. 정형구와 한준희는 A씨를 뒤쫓지 않았다. 
그리고 정형구는 장씨가 보는 앞에서 죽어가는 김씨의 뒤통수에 엽총을 대고 확인사살했다.

“이 자식들아 나도 죽여” 남편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본 장씨는 악에 받쳐 정형구에게 달려들었다. 
정형구는 장씨를 밀쳤고 다시 일어나려는 여자의 복부에 총을 한 발 쐈다. 
장씨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정형구는 그 사이 장씨의 턱을 겨냥해 한 발을 더 쐈다. 
김씨는 두개골이 파열됐고 장씨의 몸에선 20여군데 탄환 흔적이 발견됐다. 
7년을 기다린 신혼의 꿈은 정형구의 총에 스러졌다.

정형구는 범행 은폐를 꿈꿨다. 강도짓으로 보이려고 그랜저에서 올림푸스 카메라 1대와
 여성용 루즈 등이 들어 있는 여행용 가방, 양복 상의, 지갑을 꺼냈다. 
현금 80만 원을 가지고 간 후 나머지 물건은 인근 숲에 버렸다.(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