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나온 반달

비단 이불 속에서 자폭한 마지막 공비

초원의 호수 2024. 1. 29. 23:16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에 실패한 김신조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휴전선쪽으로 도주했다.
이어진 군단 규모의 대 토벌 전에서 사살당한 두목 김종웅의 이야기는 전에 소개를 한 바 있다.
토벌 작전 열흘 뒤 마지막 공비가 소탕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사살 된 공비의 최후는 그 지역에서 
군복무를 했던 필자의 기억에 현지 주민들에게 직접 들은 일화로서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를 체포하려고 출동했던 중대장은 66년 8월 9일, 월남 캄보디아 접경 둑코 전투에서 
맹호부대 1개 중대를 지휘하여 공격해온 월맹군[2개 대대] 중 176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둔 
영웅 이춘근 대위였다.
   
 둑코 전투 후의 이 춘근 대위
둑코 전투는 나중에 승리를 거둔 짜빈동 전투와 함께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거둔 2대 대첩으로 
꼽히기도 한다.

아래는 조선일보의 1968년 2월 1일 보도이다.
30일 밤 10시 파주군 광탄면 00부락 맨 꼭대기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김중일 노인[78세,가명]의 집에 느닷없이 괴뢰 무장 특공대의 잔당 1명이 들이닥쳤다.

김 노인은 사랑방에서 부인 이부산[61세]씨와 문산에서 세배 온 
막내 아들 재근[32세, 가명]씨를 데리고 한창 설날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1968년 설날 밤에 공비가 찾아온 경기 파주군 광탄면의 외딴 집.
그 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있어 김 노인이 이야기를 끊고 방문을 열었는데 
괴한 1명이 총부리를 김 노인의 코 앞에 바짝 갖다 대었던 것이다.

“이북에서 왔는데 밥 좀 주시구레.”
아들 재근씨와 부인 이씨는 방 안에 들어 선 괴한을 보고 와들와들 떨며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김 노인은 곧 정신을 차리고,
“자, 추운데 앉으시오. 마침 우리 막내가 저녁을 먹으려던 참인데 이거라도 드시우."라며 
은근히 말을 던졌다.

공비는 비로서 총을 거두고 아들 재근씨가 먹으려던 돼지고기 찌개와 
쌀밥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공비는 안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서울 갔다 오는 길인데 서울은 큰 판잣집뿐이더구만요.”
김 노인이 눈짓을 하자 재근씨는 부엌에 나가는 척하며 밖으로 나가 이웃 방에 세든 
사영식씨 [32, 가명]의 방으로 건너갔다.

사영식씨와 재근씨는 아랫 마을 이장 김옥순씨[48, 가명]에게 뛰어가 
무장 공비가 나타났다고 말하였고, 
김씨는 동네 청년들을 깨워 앰프 방송소에 잠복하고 있던 군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신고를 받은 이향수[27] 중위, 김의열 상병, 박동건 상병 등 3 명은 
곧 김 노인 집으로 달려가 포위망을 폈고, 
운전병 방이랑 일병을 시켜 미 2사단 대 간첩 작전 중대에 있는 중대장 
이춘근 대위[35]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재근씨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공비가 눈치 못 채도록 말을 건넷고 
김 노인은 막걸리 반 되를 반주로 따라 주며“하룻밤 푹 쉬고 가라.”고 권했다.
마음을 놓은 공비는 요강을 갖다 달라고 말했다. 
김 노인은 요강과 대야에 따뜻한 물을 떠서 갖다 주었다.

공비는 따뜻한 물을 보더니 발에서 불이 붙는 것 같다면서 발을 씻어야겠다고 말했다. 
김 노인은 공비의 양말 세 컬레를 손수 벗겨주고 발을 씻어 주었다. 
발 고린내가 방에 진동하였다.

그 동안 이 노파는 수수엿을 세 번이나 갖다 주고 들락날락하며 
밖에 있는 군인들과 연락을 취할 수가 있었다. 
냉수를 다섯 그릇이나 마셔 버린 공비는 오른쪽 허벅다리의 관통상을 내보이며 
사흘만 묵어가게 해달라고 졸랐다.

김 노인의 은근한 대접에 공비는 자신이 청주 한씨이고 스물 다섯 먹은 총각이라는 
말까지 털어 놓으며 김 노인을 아바이라고 불렀다.
“아바이! 아바이 신세는 꼭 갚겠습니다. 요 다음 5월에 내려올 때 노동당에 이야기해서 
아바이 신세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공비는 졸린듯 하품을 해댔다. 
김 노인은 이 방이 바깥 방이라 위험하니 안방으로 들어가자고하여 
공비를 안으로 안내했다. 김 노인은 새로 꾸민 비단 이불을 내려 따뜻한 아랫목에 깔아 주고 
요강과 물 주전자를 넣어 주면서,
“혹시 밖에서 인기척이 나도 놀라지 말게. 인천서 세배 온 손자와 손자 며느리가 
멋도 모르고  들어올지 모르니까 모르는 체하고 자란 말일세!“라고 타일렀다.

괴한은 등잔불을 끄고 잠이 들었고 사씨 부인과 두 어린이 그리고 김 노인 가족들은
 조용히 집에서 나와 피신했다.
뜬 눈으로 밤을 세운 김 노인과 군인들은 날이 새길 기다려 공비를 생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새벽 6시 50분 쯤 아래쪽에서 00사단 장병들이 들이 닥치면서 아군 포위 병력을 
무장 괴한으로 오인하고 총을 쐈다. 
방안의 동태를 살피던 이 대위는 공비가 벌떡 일어나는 기미를 알아채고 소리 쳤다.

“김신조도 자수해서 평안히 살게 되었다.
 너는 이제 완전히 포위되었으니 조용히 자수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잠시 후 꽝! 하는 수류탄 폭발 소리가 나며 방문이 떨어져 나가고 조용해졌다. 
공비가 자폭한 것이었다. 수류탄을 입에 물고 비단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그는 머리가 절반이나 날아가서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다.
이 대위는 공비를 생포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며 못내 아쉬워 했다.

당시 서부 전선의 미군 작전 지역에도 무장 공비들이 출몰하여 
미군 사상자들이 자주 발생했었다. 미군들도 공비 토벌차 출동하곤 했는데 
지형에 익숙하지 않아 효과가 별로 없었다. 
이에 한국군의 협조을 받아 공비의 습격에 대비하였다.

월남 둑코 전투에서 존슨 미 대통령으로부터 은성 무공 훈장을 받았던 
이 대위는 일 년 전 이 날이 바로 서부 전선 미 2사단에 대 간첩 작전 중대인
 CAO(Civil Affairs Operation, 민사작전) 부대가 창설된 날이었다라고 귀뜸 해주었다.


내가 근무 하던 부대는 공비가 죽은 광탄면에서 인접한 적성면에 위치해 있었다.
1.21 사태 때 여러 공비들이 인근에서 소탕되었지만 유독 이 공비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가
 두드러지게 동네 어른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들은 바로는 이렇다.
도주하던 공비가 광탄면의 한 민가에 침입하여 밥을 빼앗아 먹었는데, 
겁을 먹은 주인이 너무 잘해 주니까 안심하고 푹 자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군대에 포위되었고, 국군의 투항 권유에 공비는 "속았다!" 라고 한탄하고서 
수류탄으로 자폭했다는 것이다.

공비는 또 후대에 크게 감격하며 밥을 먹으면서도 "아바이! 조금만 참으시라요. 
수령님이 곧 조선을 통일 할거라요!“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며 노인을 위로하더라는 것이다.

공비의 머릿속에는 북한에서 배운대로 미제 괴뢰 군사 정부의 학정에 신음하는 
남한 인민들이 김일성 원수를 그리워한다는 선입견으로 꽉 차 있었다는 말이다.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냉전 분위기가 가시지 않은 그 무렵 동네 분들의 이야기는 
멍청한 북한 공비 놈이 노인에게 속아 토벌되었다는 경멸 섞인 조롱을 담고 있었다.

 공비가 자폭한 방
 공비가 요청한 요강과 주인노인이 가져다 준 물 주전자가 보인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 그 공비의 죽음을 다시 생각해보니 연민의 정이 앞선다.
특수전 전문가의 평에 의하면 1.21사태는 부족한 정보로 엉성하게 기획한 엉터리로 작전으로 
목표 달성 여부에 관계없이 1.24군 부대원의 완전 생환은 제로에 가까웠다고 한다.

투입 인원의 생환 가능성이 극히 낮은 작전은 실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 
특수전 작전의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투입 인원이 모두 죽더라도 작전 목표의 일부라도 
성공하면 나쁠 것이 없으니 일단 저질러 보자는 김일성의 사고방식이 
위의 순진한 공비가 자폭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한 원초적인 원인이었다.

실패한 1.21사태가 김일성에게 준 교훈은 거의 없었다. 
그는 그 해 10월 또 다시 120 명의 대 부대를 울진 삼척 지구에 침투시켜
 몽상에 가까운 유격전을 해보겠다고 했다가 섬멸의 맛을 보아야했다.

그러나 1.21사태가 김일성에게 준 교훈이 하나 있었다. 
남한에 침투한 1.24군 부대가 법원리에서 나무꾼 형제들에게 발견된 것이
 작전 실패의 단초가 되었는데, 이를 통해 남한 주민들이 
모두 북한에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던 것이다.
 
이후 울진 삼척 공비들은 북한 출발 전부터 남한 주민들을 
학살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 결과 이승복 군을 비롯해서 
여러 죄 없는 양민들이 학살되었다.

결국 김일성의 무모함과 잔인성이 남과 북의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키는
 씻지 못할 죄악을 저질렀다과 봐야한다.

출처;울프독의 War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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